촌(村)사람이 문화가 바뀔 때
고국에 처음 갔을 때가 이곳에 온 지 삼십 년이 훌쩍 지났을 때이다.
갑자기 변해버린 환경에 우선 제일 힘 들었던 것은 길을 찾는 일과 교통편이었다.
그것은 꼭 끼인 옷을 입고 행동하는 것처럼 움직임에 자유스럽지 못하고 불편했지만,
꿈에도 그리던 내 고향을 찾는 즐거움에 비하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보다도 나의 걱정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의 대화에 있었다.
강산이 네 번 가까이 변하고 서로 다른 문화에서 스며든 생활로 인해,
혹시나 한국 정서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을까 염려 스러웠다.
그로 인해 자칫 잘 못 하다가는 친구의 틀을 깨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졸림을 참아가며 보고픈 얼굴을 대할 시간이다.
여보게! 혹시 자네 듣기에 한국 정서상 거북한 말과 행동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고,
알다시피 다른 곳에서 오랫동안 지냈었다는 것을 헤아려 주게나! 나 역시 친구들의 말을 넉넉하게 듣겠네!
하고 미리 예방주사를 주고받으니 어울리기가 편했고 약주도 술술 잘 넘어갔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친구들과 남대문 시장의 먹자골목에서 늦은 점심을 먹을 때였다.
그날의 반나절은 족히 어울려 다녔기에 주문한 국밥과 해물전은 특별한 맛이었다.
오랜만에 먹어 보는 고국의 국 맛으로 아주머니에게 조금 더 달라고 하니 넉넉한 뚝배기의 인심이 묻어난
‘짜배기’와 친절함에 기분이 좋은 시간을 보냈다. 막걸리와 파전 그리고 그윽한 분위기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일어섰다.
문지방을 넘을 즈음에 그 아주머니가 인사를 하는데 난 주머니에서 얼른 삼천 원을 꺼내 ‘잘 먹었습니다’ 하며 주었다.
안 받으려 손사래 치는 것을 기어이 손에 쥐여 드렸다. 그분은 옆에 동료에게 팽개치듯 한 모습으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였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나왔다.
며칠 후, 이곳으로 온 후에 집사람에게 그 날의 일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아니! 한국 식당에서 무슨 팁을 주어서 당황하게 했느냐?" 하며 핀잔만 들었다.
생각해보니 잠시 잊었던 한국 문화로 인하여 뒤늦게 아주머니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고깃집에서는 간혹 시중드는 아가씨에게는 팁을 준다고도 들었으며
그저 고마운 마음의 '팁'이었는데...
남들은 뒤늦게 여생을 고국에서 보내려 짐 보따리를 싸기도 한다는데,
내게는 문화가 바뀌는 또 하나의 어려운 이민 생활이 될 테니까 영 자신이 없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머리가 ‘삭삭’ 돌아가지 않으니...
아이고! 생각하기도 번거롭다. ㅎㅎ
요즘은 한국에서도 고깃집에서 불판 봐주시는 분들에게 팁을 드리기도 합니다.-어디까지나 자발적인데...자주가는 식당이라면 서빙하시는 분들이 잘 챙겨주시고 알아봐주십니다~~
저의 제일 신선한 충격였던 팁이야기는 원어민 샘을 학교앞 식당에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마침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끝낸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샘이 그릇을 치우러 온 알바생에게 1천원을 서빙했던 알바생에게 주었습니다. (상세한 상황은 기억에 없네요 ) 돌려드리려는 알바생, 킵하라는 원어민 샘. 약간의 아름다운 실랑이가 있었는데 하여튼 그렇게 주고 나오셨는데. 3천원 순두부에 1천원 팁. 신선한 충격이였죠. 팁이라는 것을 아마 그때 처음 보았죠. 처음에 어떻게 팁을 주셨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참 보기가 좋았던 마음이 훈훈했던것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지난 가을 한국에서 택시를 탓는데 아저씨가 이쁜 분이 타셨다고 노래한곡 해도 되냐고 해서 좋다고 했더니 멋지게 가곡을 불러주신 택시기사분께 내리면서 커피드시라고 3천원 요금에 1천원을 드렸더니 기분좋게 웃으신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러면서 이웃, 사람들과 기분 좋게 어울리는데에는 그렇게 큰 돈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