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된 아기
가기 싫어하는 베이비시터, 프리스쿨을 데려다주면서 내 마음이 싸~~ 하다는 느낌을 갖고 직장을 향하였던 것이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분이 잘 보아 주겠지… 하는 생각의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마이클' 녀석은 사흘 만에 새벽의 '이별'을 이겨냈는데 수소문하여 잘 보아준다는 미국 아주머니에게 맡기어졌다.
그 집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두 분의 수입이 베이비시터와 사회보장 연금으로 생활하는 듯하였다.
널찍한 집이 마음에 들었는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집에 수영장이 있어서 여간 걱정스럽지 않았다.
소개해 주신 '수호' 엄마의 성품을 믿거니와 그녀의 아들인 '수호' 역시 그 집에서 보아주니 믿음이 같다.
그분은 늦은 나이에 어렵사리 얻은 외동아들이라 각별하다. 근무 시간에도 잠깐 짬을 내어 불시에 아들을 살피고 오는 정성이 대단했다.
첫날, 아들 녀석과의 이별은 아마도 부모가 자식을 군대에 보내는 첫날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 후, 다행히 집사람과 한 직장에 다녔던 관계로 운 좋게 내가 밤일을 하게 되어 집사람이 집에 오자마자 녀석을 인계하고 직장으로 향했다.
그러다 보니 인수 인계가 늘 확실하지 않기에 공책에다 '우유' 먹인 시간과 '기저귀' 간 시간을 적어서 던져준 공책이 두 권이나 되었다.
그렇게 아무 연고가 없었던 이민 생활의 세 식구는 씩씩하게 흘러갔다.
그래도 갓 석 달 넘은 녀석이 인생살이 매를 일찍 맞아서인지 '프리스쿨'을 보낼 때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삼 년 후 '수잔'이가 태어났다. 둘이서 직장에 다니며 두 아이를 키울 재간이 없다.
남자가 남자답게 넉넉하게 수입이 되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어 장모님이 오셨다.
많은 궂은일을 도와주신 관계로 한결 편한 생활이 되었다.
세월은 흘러 '수잔'을 프리스쿨에 보내게 되었는데 할머니 품에 있다가 처음으로 학교에 가게 되니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는가 보다.
한 주 동안은 내 바지를 붙들고 울면서 떨어지려 하지 않으니...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다행히 눈여겨 우리를 보아왔던 선생님이 잘 보살펴 주어서 차차 적응할 수 있었다.
늘 픽업하러 갈 때는 그 선생님의 보살핌 속에서 미끄럼틀과 동무와의 조잘댐을 들으며 수잔이의 학교생활에 순조로움을 느꼈다.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기 전에 장모님도 가시고 모두 다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나의 생활은 아이들 얼굴 볼 시간은 주말뿐이라고 할 만큼 바빴기 때문에 입에 풀칠은 내가 맡고
교육은 집사람에게 맡기며 앞만 보며 생활을 하였다.
요즈음 와서 생각하면 생활이 나를 속였는지는 몰라도, 녀석들과 같이하는 시간이 없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길게 남아 있다.
간혹 주위에서 그 시절의 나의 모습을 본다면,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마음속으로부터 응원한다.
지금은 둘 다 독립하여 건강히 직장생활을 하니 나의 자녀가 되어준 것에 감사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도 집집마다 사정이 있다.
그러나 자녀에게 무엇이 되라고 나의 희망 사항을 한 번도 권하지 않은 것은 나의 적지 않은 자부심으로 남아있다.
저들 하고 싶은 것 하며 건강하고 바른 생활이면 족하다.
무엇보다 '아기가 좋은 친구'가 되어 건강히 곁에 있으니 이 또한 행복이 아닌가!
P.S 그동안 저의 자녀를 돌보아주신 분, 가르쳐주신 선생님!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도 당연히 다르겠지요.
안타까운것은,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이 당연히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 하는것에 인색하다는 것이더라구요.
다르기 때문에 "서로 배우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