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기쁘게 하는 것이 있으면 슬프게 하는 것도 있게 마련인데, 떠오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면서 저자가 태어난 독일보다는 한국에서 유명했던 안톤 슈낙(1892-1973)의 에세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생각납니다. 사라져 가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는 지극히 당연하지만, 무심히 지나치는 우리의 생활이었습니다.
문명의 가파른 발달로 인해서 편리함을 앞세워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스마트폰이 그 대표적인 것이 아닐까요? 가족은 물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의 대화도 예전만 하지 않습니다.
모두 소셜네트워킹에 빠져서 정작 참다운 대화는 소멸 되어갑니다.
자녀와의 대화는 식탁 위에 놓인 중요한 반찬이 되어버린 스마트폰으로 인해 실종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개인으로부터 손편지를 받아 본지도 참으로 오래되었나 봅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우체통을 많이 줄였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내가 어렸을 적인 오심 년 전에 있던 둥글고 빨간색의 우체통이
마음 한구석에 정겹게 남아 있습니다.
오십 년대에는 전화란 부잣집에도 설치하기 어렵던 시절에 오직 편지가 유일한 소통의 기구였으니까요.
군대에 간 아들에게 소식을 듣고 싶은 아낙네는 읍내로 걸어와 빨간 우체통에 사랑의 마음을 넣습니다.
청춘 남녀들의 애틋한 보고 품과 밤새도록 고쳐 쓴 사랑의 손편지!
일주일이 지난 다음에야 받았던 기다림의 기쁨도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21세기에 한심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의 전도사인 빨간 우체통의 그 추억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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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니 내게 직접 영향을 미쳐 슬프게 하는 것도 늘어갑니다.
언제부터인가 침침한 눈으로 생활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버겁습니다.
어느 날 ‘콜라병’ 밑바닥 두께의 안경을 걸쳐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
라면을 먹으려 봉지를 찢으려 합니다.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꿈쩍하지 않습니다.
서랍 속에 가위를 찾을 때, 나는 또 한 번 비애(悲哀)를 맛보게 됩니다.
요즈음은 지구의 온난화와 미세먼지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으며 나아질 기미는 전혀 없습니다.
다른 것은 내가 피하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되겠지만, 이것은 참으로 슬프고 두려운 환경 재앙입니다.
작년 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간단한 안부의 말씀 뒤에 “여보게! 5월 초에 집에 들를 수 있겠는가?”
"예, 그리하지요.” 대답하고 한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그 집에는 삼 남매가 있었는데 두 자녀는 혼기가 훌쩍 넘은 나이라 그저 결혼을 하나 보다 생각하고 소식이 오겠지 하고 잊고 지냈습니다.
그리고 가을 어느 날에 아들을 만나서 형님의 안부를 물으니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때의 참담한 심정은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들의 눈에는 섭섭한 감정이 묻어나는 눈물이 보입니다. "아저씨! 모르셨어요?" “응 몰랐는데 ...”
잠시 후 나는 형님께서 알고 지내신 분들이 장례식장에 별로 오지 않은 섭섭함의 눈물임을 알아차렸습니다.
나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며칠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분과 나의 관계는 미국에 오면서부터의 인연과 늘 좋은 말씀으로 도와주신 분이기에 더 슬펐습니다.
3년 전부터 병환으로 고생하신 분이 마지막 때를 정확히 아시고 내게 전화를 주셨는데 다르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늘 조언을 해 주셨던 분이 떠나셨을 때 그분의 존재감이 내게는 더욱 크게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정확히 5월 말에 저세상으로 떠나셨습니다. 마지막 수화기 넘어 하신 말씀이 종종 나의 마음을 적십니다.
“여보게! 오월 초쯤 집에 들를 수가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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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에서 건강히 편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