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글을 읽고
작가의 1980년대 초, 학창시절 이야기이니 나 역시 충분히 공감이 가는 시절의 글을 감명 깊게 읽었다.
아주 잘 쓴 글이라도 휘발성이 있어서 오랫동안 기억되는 글은 많지 않은데, 작가의 어려운 시절의 이야기가 슬펐던 그 시절의
솔직한 표현으로 인해 오랫동안 찡한 여운을 남기게 했다.
글을 읽다 보면 자신을 과시하며 타인에게 교훈하는 글도 접하게 되며 때로는 겸손하지 않은 글은 작가의 자랑으로도 비추어질 때가 있어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누구나 자기의 치부(恥部)를 드러내기는 쉽지 않아서 그것이 옛 과거의 일 일지라도 표현하기 쉽지 않다.
이 글은 가난했던 80년대 시절에 한 가정의 치부(恥部)를 이야기하며 타인이 공감할 수 있게 써 내려간 좋은 글이다.
작가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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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떨이에 맞은 엄마... 나도 모르게 "도망가" 소리쳤다.
예전에 어느 집이든 안방이나 거실에 묵직하고 커다란 재떨이가 흔했다. 그런 재떨이가 우리 집에도 있었다. 재떨이는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고혈압·당뇨·해소천식 합병증으로 몸이 아프셨던 아버지는 늘 기침을 하면서도 담배를 태우셨다.
아버지는 내가 여덟 살 때 이미 몸이 아파 집에만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돈 벌어 오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사는 게 그랬으니 아버지는 엄마와 부부싸움이 거의 매일이었다.
아버지는 이따금 컨디션 좋은 날에는 동네 평상에서 아저씨 아주머니들과 술을 드셨다. 아버지가 술에 취했든 안 취했든 사흘 걸러 대문 밖에까지 밥솥과 살림살이가 날아다녔고 찌그러진 채 나뒹굴었다. 나는 학교에 가는 것도 싫었고 하교해서 집에 돌아오다 대문 밖에 우그러진 살림을 보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아버지가 못 지킨 가장의 자리를 엄마가 대신했다. 그 당시 엄마는 여관에 가서 객실 청소와 일꾼들 밥해주는 일을 하셨다. 여관에서 가져온 OO장이라 인쇄된 흰 수건들이 우리 집 작은 마당 빨랫줄에서 자주 펄럭였다.
아버지는 담배를 유독 자주 피우셨다. 우리 집에도 어른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만 한 유리 재떨이가 늘 아버지 손에 붙어 다녔다. 한 평 남짓 단칸 월세방에 캐비닛 하나 놓고 식구가 살던 시절이었다.
방안에서 온종일 독한 담배를 피우니 온 집안에 매캐한 담배 연기가 배는 것은 당연했다. 벽지도 천장도 초라한 중고 캐비닛조차 누런 니코틴에 찌들어 있었다. 가끔 엄마가 여관에서 가져온 흰 수건으로 캐비닛을 닦으면, 갈색 커피 빛깔의 진득한 담뱃진이 묻어났다.
내가 사춘기였던 1985년쯤으로 기억한다. 나는 전학 가는 학교마다 행정실로 불려 다녔다. 평소 말 수도 없고 딱히 절실한 친구도 없고 수업 시간에 생전 손들고 발표도 할 줄 모르는 투명인간인 나였다. 그런 내가 교내에 알려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수업료를 단 한 번도 제때 내 본 적이 없었다. 집에 가서 수업료 얘기만 하면 그날은 아버지가 엄마를 밤새 때리셨다. 나는 그게 너무 지옥 같았다. 그래서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아예 집에다 수업료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새벽 일찍 일을 나가야 하는 엄마가 잠 한숨 못 자고 밤새 아버지 주먹에 맞는 것보다는 차라리 행정실 드나드는 편이 훨씬 나았다.
수업료가 워낙 많이 밀려 있었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마치고 청소시간이면 단골로 행정실에 불려 다녔다. 그때는 교내 스피커를 통해 수업료 밀린 학생 이름을 방송하고 행정실로 불렀다. 한창 예민했던 사춘기라 처음에는 정말 창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자주 겪으니 나중에는 이골이 나서 한 번씩 웃어넘기면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행정실에 불려가 고개를 숙이고 빌었다. 행정실장님이 수업료가 너무 많이 밀려 더는 봐줄 수 없다며 다그쳤다. 내일 당장 밀린 수업료를 안 가져오면 학교에 나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날 저녁 식사가 끝나가던 쯤 나는 학교에서 밀린 수업료를 가져오란다고 어렵게 입을 뗐다.
그때 아버지는 여태 학교 수업료도 안 내고 뭐 했냐며 엄마를 향해 윽박질렀다. 늘 여관 청소에 일꾼들 밥해주며 피로에 찌든 엄마도 그날은 아버지께 대들었다.
“돈 벌어 뭐했느냐고요? 쌀하고 연탄 사고 반찬값하고 한 달 치 버스토큰 사고 당신 약값에 병원비에 당신 외상술값 갚고 당신 담배 몇 보루 사고 그나마 몇 푼 남은 돈 다 당신한테 바치고 대체 내가 돈이 어디 있어요? 제발 당신 정신 차리고 어지간히 좀 해요. 동네 평상에서 대낮부터 술 퍼마실 돈 있으면 애 수업료 내라고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동네방네 남의 여편네들 데려다 대낮부터 술 퍼마실 돈은 있고 애 수업료 줄 돈은 없어요? 나도 단 하루도 못 쉬고 일하는 팔자 지긋지긋해요. 내가 돈 버는 기계예요? 이젠 정말 지쳤다고요!”
평소에 말대꾸하지 않던 엄마가 그날은 왜 그랬을까? 엄마는 그간 쌓인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작정한 듯했다. 이윽고 밥상이 뒤집히고 된장찌개와 김치가 벽을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아버지 손아귀에 엄마의 머리채가 잡혔다. 내가 말리자 아버지는 나까지 발로 밟고 때리셨다. 한번 폭행과 구타를 시작하면 주인집 할머니가 맨발로 달려와 뜯어말려도 밤을 새우는 아버지셨다.
아버지는 치미는 화를 삭이려 줄담배를 피웠다. 궁지에 몰린 쥐처럼 엄마는 아버지께 대들었다. 커다랗고 투명한 유리 재떨이에 신경질적으로 담뱃재를 떨던 아버지가 엄마에게 입 닥치라 했을 때 엄마는 그 말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 순간 희고 투명한 뭔가가 내 앞을 휙 지나 엄마 얼굴을 향해 원반처럼 날아들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엄마가 두 손으로 한쪽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았다.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유리 재떨이를 엄마 얼굴을 향해 던진 것이었다. 나는 식겁해 엄마에게 재빨리 다가가 얼굴을 살폈다. 유리 재떨이 둘레의 날카로운 원형 부분이 회전하며 허공을 날아가 엄마 한쪽 눈에 맞고 말았다. 살갗이 움푹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다. 나는 놀라 울며 엄마 얼굴을 살폈다. 엄마는 괜찮다며 거즈 손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그때 한쪽 손에 담배를 든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 재차 엄마 옆구리를 발로 밟으려 했다.
“엄마! 도망가!”
나도 모르게 외쳤다. 이웃집은 모두 잠든 한밤중이었다.
그날 밤 엄마는 대문 밖으로 사라지셨고 먼동이 터 올랐다. 나는 밤새 엄마가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엄마의 찢어진 상처가 너무 깊었기 때문이다. 엄마 수중에 돈 한 푼 없이 아버지께 모두 갖다 바치는 엄마였기에 더 걱정이었다.
‘이 야심한 밤에 엄마는 어디로 가셨을까? 어딘가에서 눈이라도 잠시 붙이고 계실까? 다친 눈은 괜찮으신 걸까? 불쌍한 우리 엄마.’ 나도 잠이 올 리 없었다. 엄마가 문밖으로 도망치듯 사라지자 아버지는 얼마 안 가 잠들어 코를 골았다.
아침 등교 시간이 되어도 나는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수업료를 준비 못 한 것도 걱정이었지만 그보다 재떨이에 맞은 엄마의 얼굴이 더 걱정이었다. “너 학교 안 가? 당장 학교 가!” 퉁명하게 호통치고 돌아누워 기침을 쿨럭이는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다. 나는 그날 학교에 지각했다.
오전 수업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전화해볼 곳도 없었다. 엄마가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어떡해야 할지 그것도 고민되었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서는 나야 어찌 돼도 좋으니 가여운 엄마가 영영 이 지옥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고 빌었다. 제발 엄마만이라도 어딘가로 떠나 행복하길 바랐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밀려오는 엄마 걱정에 마음이 타들어 갔다. 그때 같은 반 친구가 나의 이모가 교문 밖에 면회 왔다며 나가보라 했다. 나는 이모가 없었다. 엄마는 외동딸이셨다. 그런데 그 친구는 자꾸만 나가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등 떠밀리듯 실내화를 끌고 교문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친구가 장난쳤구나 싶어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명희야….”
누군가 아주 희미하게 나를 불렀다. 그런데 그 시간에 누구도 나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발길을 교문 안으로 돌렸다. 그때였다.
“명희야….”
나는 얼른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몇 미터 떨어진 전봇대 뒤에서 한 여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는 한쪽 얼굴에 부상병처럼 칭칭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엄마였다. 간밤에 유리 재떨이에 얼굴을 맞고 어딘가로 도망쳤던 엄마가 내 앞에 계셨다. 나는 달려가 엄마 얼굴을 살폈다.
“엄마! 괜찮아? 어디 봐.”
엄마는 내가 상처를 못 보게 고개를 돌리셨다. 엄마가 손에 꼭 쥔 뭔가를 내게 건넸다. 돌돌 말린 지폐였다. 엄마는 간밤에 돈을 빌려 내 수업료를 주러 오셨다고 하셨다. 나는 눈물이 핑 돌며 화가 치밀었다.
“이것 때문에 왔어? 수업료 이까짓 게 대체 뭐라고! 엄마 얼굴 많이 다쳤지? 엄마 병원비 해야지 무슨 수업료야. 싫어! 그리고 엄마가 내 이모라고 했어?”
“어….”
“왜?”
“너… 엄마 때문에 창피할까 봐….”
그날 엄마와 나는 전봇대 앞에서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붕대 감은 얼굴 때문에 행여 당신 딸이 창피할까 봐 엄마라고도 못하고 이모라고 둘러대면서 수업료를 구해와 딸을 기다리던 나의 엄마.
“엄마 제발 그렇게 살지 마! 고생 그만해. 나 이제 다 컸어. 공장이든 어디든 가서 돈벌이할 수 있어. 그러니 제발 도망가서 이제라도 엄마 인생 살아. 어디로든 도망쳐. 그리고 다신 집에 오지 마!”
고개 숙인 엄마가 힘없이 내게 말했다.
“명희야. 엄마가… 우리 막내딸 여기 두고 어디로 가니? 엄만 너 두고는 절대 어디 안 가.”
그날 나는 더 늦기 전에 여자로서나 한 인간으로서 엄마의 길을 가시라고 애원했다. 나는 이제 다 컸기에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 밥 굶지 않을 자신 있다고 호소했다. 엄마는 끝내 내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 막내인 내가 어른이 되고 시집을 가고 아이를 낳을 때 친정엄마의 자리가 무척 필요하다고 그래서 못 떠난다고 하셨다.
그날 엄마의 뒷모습은 학교담장을 따라 길게 뻗은 가로수 길로 천천히 사라졌다. 그 후 당분간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담배 연기는 점점 더 집안을 점령해 갔다. 어딘가에서 치료를 하시는 것인지 나는 며칠 걱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주일쯤 지나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 신발이 보였다.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많이 야윈 엄마가 이마에 거즈를 붙이고 나를 보았다. 엄마가 희미하게 웃고 계셨다. 엄마는 비좁은 부엌에서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밥상을 차리고 계셨다. 아버지는 방 안에서 담배만 피우고 계셨다.
나는 공포에 젖은 채 아버지 눈치를 살피다 말없이 엄마 곁에 쭈그려 앉았다. 엄마 숨소리를 고요히 느껴보았다. 힘겹게 돌아와 준 엄마가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가여웠다. 기쁨과 함께 나도 모르게 가슴 한쪽이 체한 것처럼 콱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엄마는 며칠 전 우리 집에 오셔서 췌장암 제거 수술을 받으셨다. 연세보다 너무 늙고 골병이 들어 이제는 잘 걷지도 못하는 엄마. 얼마 전 나는 작은 상을 하나 탔다. 엄마는 내가 문학상을 탈 때가 가장 보람 있고 기쁘다며 환하게 웃으셨다. 어쩌면 나는 엄마의 미소를 찾아드리기 위해 더 열심히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이번 생에서 나와 엄마의 종착지는 과연 어디일까. 누구나 살다가는 한세월이지만 우리에겐 유독 길고 추운 인생의 겨울이 찾아들 때가 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고 봄은 반드시 온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부디 힘들더라도 희망을 놓지 않기를 바란다.
작가소개
김명희 시인 / 소설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KBS 아나운서,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 당선
그런 삶을 산 사람들도 있는데
우리네는 정말 복에 겨운 삶을 살고 있는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