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사람(1)
이곳에 와서 얼마 되지 않은 삼십 대 초반 이야기이니 벌써 삼십 년이 훌쩍 넘었다..
1970년대 말, 이 지역에서 원 배드룸을 얻어서 직장에 다니고 있을 때이다. 이곳은 흔치 않게 단층으로 된 건물이다.
나와 담장을 사이로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Dan’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주말이면 커피잔을 들고 Patio에 있는 의자에서 휴일을 한가롭게 만끽하곤 했었다.
언젠가 인사를 나누고 좋은 이웃으로 지내며 나에게 타향살이의 시름을 달래주는 친구가 되었다.
직장이 끝나는 시간이 엇비슷해서 저녁이면 만나서 시원한 맥주로 갈증도 풀었다.
언어적으로 무척 답답했을 서로 간의 의사소통은 이럭저럭 해가며 몇 달이 지났다.
우리는 의기투합해서 그 단지 안에 있는 ‘투 배드룸’으로 이사를 하여서 생활비도 줄이고 서로에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두 살 터울인 그는 동양에서 온 나와는 생각과 모든 면이 서로 다르지만,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좋은 친구로 지내게 되었는지,
그에게 늘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살고 있다.그는 단순한 사고방식에 배울 점이 많은 친구로 같이 룸메이트로 지냈던
일 년여가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하얀 쌀밥도 좋아해서 장을 봐온 ‘ground beef’를 ‘팬’에 볶아서 간장치고 쓱쓱 잘도 비벼 먹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백인이고 형제는 위로 세 살 터울의 형이 있다.
가끔 형이 애인과 함께 놀러 오면 잠시 이야기 하다가 ‘bye’ 하고 짧은 여운을 남기고 돌아가곤 하였다.
그때만 해도 나의 눈에는 형제라기 보다 친구가 잠시 들렀다 가는 그리 친밀함은 느낄 수 없었다.
아마도 미국생활이 얼마 되지 않았던 때의 문화 차이였을 것이다.
‘댄’에게는 열 살 정도 많은 친구가 있었는데 직장이 끝나면 우리 아파트에 자주 찾아와서 ‘rock music’도 듣고 놀다가
열 시쯤 돼서야 돌아가곤 했다.
그는 이혼하고 딸만 둘이 있는 백인이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데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 내게는 이상하게 보일 때이다.
물론 그때는 ‘히피’ 문화가 쇠퇴해 가는 시기이지만, 간혹(間或) ‘마리화나’를 하는 것도 보았다.
대부분의 청년은 작고 귀여운 저울을 모시고 살던 때이다.
가끔 ‘산타크루즈’도같이 가곤 했는데 어느 날 볼 일이 있어서 둘이 갔다 오라니까 ‘댄’이 하는 말이 ‘Jim’ 너 심심하면 한 대 피우란다.
그 녀석들 이야기로는 beer 6 pack보다 훨씬 싸게 먹히고 깨끗한 기분이란다.
그 당시는 위법인지는 모르지만, 친구지간에 스스럼없이 권하던 시대이다.
나는 그러나 마리화나를 피울 만큼의 개방적 이지도 않았고, 한국서 건너온 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한번 단호히 거절하니 다시는 권하지 않았다.
어느 초여름에 ‘댄’과 나는 같은 시기에 휴가를 일주일 내었다.
나에게 Ione, CA 에있는 부모집에 가자고 해서 그가 며칠 전에 뽑은 스포츠카를 타고 떠났다.
서 너 시간 걸려 도착한 곳은 조용한 시골에 다운타운 정도 되는 곳이었다. ‘댄’의 소개에 이어 부모님은 반갑게 맞아 주셨다.
아버지는 부근에 있는 고등학교 영어 선생이고, 어머니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골에서 유유자적하며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뜰에는 와인 저장소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아 들어가 보니 어두 컴컴한 곳에 적당한 기온과 습도로 이색적인 구경도 할 수가 있었다.
아! 풍류가 숨 쉬는 시골의 삶이다. 집안에는 그 흔한 ‘텔레비전’도 없고 신문과 고물 라디오와 강아지 한 마리가 눈을 끔벅거리고 있다.
자세히 보니 수명이 다 되어 잘 보이지 않는듯했고 행동도 매우 굼뜨다. 저녁이 되어 어머니가 정성껏 밥상을 차려 주셨다.
다 먹은 후에 ‘댄’이 부엌으로 간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접시를 닦을 태세다. 아! 나도 눈치로 얼른 같이 가서 쓱싹쓱싹 닦았다.
그때 나의 기분이 이상했다. 한국 엄마 같으면 오랜만에 돌아온 아들에게 그렇게 당연시 그림책을 보며 나 몰라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아! 여기가 미국이지 하고 금방 알아차렸다.
그날 저녁은 ‘댄’과 나는 그 작은 동내에 ‘bar’로 가서 맥주 한 잔씩하고 기분 좋게 돌아와서 잠에 떨어졌다.
다음날은 아침 식사 후, 댄의 아버지와 함께 살던 주위를 구경시켜주며 아직 그곳에 사는 친구도 만나고 졸업한 학교도 가 보았다.
적은 동내라 많이 볼 것은 없었지만, 친구가 그곳에서 자라 왔다는 것에 정감이 가는 시간을 보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썰렁한 집안에 ‘텔레비전’ 하나 없이 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것이 그분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것을 후에 알았다.
저녁 시간이다. 나는 마음가짐을 단단히 하고 식사가 끝나자마자 먼저 부엌으로 달려갈 준비를 했고 ‘댄’보다 먼저 가서 접시를 같이 닦았다.
‘댄’이 접시를 닦다 말고 제 엄마를 부른다. 엄마! 아까 그 'salami’가 맛있었는데 조금만 주세요?
엄마는 부엌 벽에 있는 것을 떼어서 반으로 자르더니만…
어저께 6불 주고 산 것이니까 네가 필요하면 3불만 내라고 한다. 난 그 자리에서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to be continued …
Ione 이라는 조그만 농촌 시골 동네의 이름이 낮설지가 않네요.
Ione City에있는 Castle Oaks G.C 로 골프를 치러 가끔씩 가곤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좋은 추억들을 많이 공유하고 있으신 무심님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 입니다.
다음편이 은근히 기다려지네요 ㅎㅎ